제목 - 번뇌, 돌고 도는 윤회의 씨앗 - 날짜 2017.02.17 13:14
글쓴이 무법정사 조회 749

번뇌, 돌고 도는 윤회의 씨앗

 

우리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고 돕니다.

이번 생에서만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돌고 돕니다.

이를 보통 윤회라고 합니다.

이 생이 다하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생사 윤회이지만,

지금 이 순간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도 생사 윤회입니다.

옛 말씀에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사(死)라 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졌다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마음 아파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까지 가져와 번민합니다.

단지 이 끊임없이 헐떡거리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 스님들은 세수하면서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하고, 손 뒤집는 것보다 쉽다고 합니다. 마음 한 번 돌이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의 궁전을 장엄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탐욕을 버리고 고행하였음이고,
중생이 불타는 집에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 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했음이라.
- 『발심수행장』, 원효 스님

 






이렇듯, 우리가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불타는 삼계에 윤회하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수행과 관련하여 번뇌의 대표 선수로 ‘탐욕(특히 애욕)’만 언급하였지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비롯하여 모든 번뇌를 포함합니다.







번뇌! 몸과 마음을 번거롭고 어지럽고 핍박하고 괴롭게 하기 때문에 번뇌라고 합니다.

어원적으로는 ‘집착하는’, ‘물들이는’, ‘더럽히는’이라는 뜻에서 생긴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을 끊임없이 물들이고 더럽히며, 그에 따라 마음에 온갖 고통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에 경전에서는 번뇌를 루(漏), 폭류(暴流), 액(脈), 취(取), 결(結), 박(縛),

전(纏), 구(垢), 염오(染汚), 개(蓋), 혹(惑), 수면(隨眠) 등 여러 용어로 사용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것이라는 뜻에서 루(漏, 새어나오다)라 하고,

홍수가 마을과 숲을 휩쓸어 가는 것처럼 번뇌가 착한 성품을 휩쓸어 간다고 하여 폭류(暴流)라 합니다.

소가 멍에에 의해 수레와 연결되어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에 의해 생사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에 액(脈, 멍에)이라 합니다.

번뇌가 생사의 결과를 갖게 하기에 취(取)라 하고, 번뇌가 마음을 묶어 생사의

고통과 함께 하게 하기 때문에 결(結, 맺다) 또는 박(縛, 묶다) 또는 전(纏, 묶다)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도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오염시키기 때문에 구(垢, 더럽히다) 또는 염오(染汚)라고 하고,

번뇌가 착한 마음을 덮어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개(蓋, 덮다)라고 하며,

마음을 미혹하게 하므로 혹(惑)이라고 합니다.

잠[眠]을 즐길수록 잠이 더 늘어나는 것과 같이 번뇌가 중생을 따라서[隨] 잘못을 더하기

[이때 면(眠)은 더함의 뜻입니다] 때문에 수면(隨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름을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아무 번뇌에다 다 붙여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특정 번뇌들을 묶어 사용합니다.

가령, 삼독(三毒)하면 탐진치를 말하는 것처럼,

폭류는 사폭류(四暴流)로 욕폭류(欲暴流)·유폭류(有暴流)·견폭류(見暴流)·무명폭류(無明暴流)를 말하며,

개(蓋)는 오개(五蓋)로 욕탐개·에개[(瞋迷, 성냄)]·혼침개[(閻沈, 침체)]·도거개[(掉擧, 들뜸)]·의개[(疑, 의심)]를 말합니다.







특히 수면(隨眠)에 대해 부파불교에서는 다른 견해가 있었습니다.

설일체유부는 수면을 번뇌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경량부는 수면을 말 그대로 ‘잠자고 있는 번뇌’로 보았습니다.

번뇌가 지금 비록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 한 곳에 잠자고 있다가 여건이 되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번뇌를 전(纏)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경량부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잠자고 있을 때를 수면,

일어났을 때를 전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이러한 경량부의 견해는 이후 대승불교인 유식사상으로 이어집니다.







기도를 하면 어느 정도 편안한 마음이 지속됩니다.

그러나 곧 마음은 밖으로 치달리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기도발이 다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기도발이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것은 단지 번뇌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 그 씨앗마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번뇌는 잠자고 있다가 조건이 되면 고개를 내밀고 일어납니다.

불교용어로 잠자고 있을 때를 ‘종자(種子)’라고 하고,

일어났을 때를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즉, 그 순간 번뇌는 단지 ‘현행’하지 않을 뿐이지 번뇌 ‘종자’는 여전히 마음의 창고 안에 싱싱하게 저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순간 수행이 잘 된다고, 잠시 수행의 성과물을 얻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순간 번뇌가 마음의 밭에 여름날 풀처럼 자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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